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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죽음이란 무엇인가 천주사 201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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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죽음이란 무엇인가



진주에 있는 경상대학병원 암센터를 다녀왔습니다. 2년전 위암 수술을 받고 재발을 하여 호스피스 병동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어느 보살님의 병문안을 위해서입니다.

그 보살님은 내게는 속가의 형수가 되는 사람인데 많은 고생을 한 사람입니다. 일찍이 남편의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는 과부 아닌 과부가 되어 한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험난한 삶을 산 사람이지요. 그래도 아들 둘에다 딸 둘을 잘 키워서 지금은 다 결혼을 시켜 손자 손녀들을 다 보아 나름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온 한 가정의 중심에 서 있는 어머니이고 또 할머니이십니다.

병이란 언제 어떻게 오는지 알지 못하다가 갑자기 쓰러지면 그때에야 평소 잘 관리하지 못한 건강에 대한 후회를 하지만 그때는 이미 때가 늦습니다.

4월 2일, 동생인 진옥처사의 전화를 받고 곧 죽게 생겼다는 전갈에 돌아가시기 전에 찾아보는 것이 그래도 후회스럽지 않겠다는 생각에 만사를 재껴두고 달려 간 것입니다.

연락을 받고 짐작했던 것 보다는 초롱한 눈빛과 맑은 정신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나온 것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영원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줄 알지만 그래도 죽음은 누구나 받아들이기가 싶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대해서건 삶에 대해서는 언제나 편안한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살아서 편안한 마음을 가져야 그 죽음이 편안할 것이고, 죽음이 편안해야 또다시 찾아오는 삶이 편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반드시 삶을 통해서 오는 것이겠고, 삶은 또다시 죽음을 지나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변화의 과정일 뿐입니다. 변화란 먼저 것이 사라지고(死)새로움이 도래(到來=生)하는 것이라 보면 맞는 말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적 변화란 본래 그 실체가 없는 연기(緣起) 작용(作用)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삶과 죽음의 실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분별하는 지각을 실체로 믿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계와 만물은 이러히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통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우리도 그 가운데 서 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과 이해의 길을 찾아보도록 해 봅시다.

불교에서의 죽음은 인생고의 근본원인 중의 하나로 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생과 사, 죽음과 열반을 다른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출발점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삶과 죽음의 근본성품을 진지하게 관찰하면 그것은 전적으로 상반되어 고정된 실체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내용은 우리로 하여금 생로병사를 있게 한 요인은 마음속의 번뇌 망상이고 나를 위주로 한 고정관념, 즉 집착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를 기준해서 지나치게 집착한 기대가 어긋난다고 할 때 괴로운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뜰 앞의 단풍잎 하나 떨어지는 걸 보는 거나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을 보는 거나 다를 게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체험을 하신 게 부처님의 생사관의 특징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법화경>에서는, 일생(一生)의 대사(大事)는 생사(生死)라는 이야기가 하나의 화두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79년간을 사시다가 열반하시기 석 달 전에, 내가 석 달 후에 열반에 들 것이니 그전에 의심나는 게 있으면 모두 물어라. 하셨습니다. 그때 많은 대중들이 무척 섭섭해 하고 애통해했습니다. 부처님을 신앙(삶)의 의지처(依支處)로 삼고 살았는데 부모를 잃는 것보다 더 마음 아픈 그런 슬픔이었습니다.

그 때 아난존자가 대중을 대표해서 물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첫 날 첫 말씀이 뭡니까? 나의 생사는 이제 끝났다. 나는 열반을 증득했다. 감로의 물이 흘렀으니 모두 와서 마셔라. 생사가 모두 끝났다고 하셨는데 왜 돌아가신다고 하십니까? 그 날 생사가 모두 끝났다고 하신 말씀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열반에 들지 말아야 할 것이고, 열반에 드셔야 한다면 그날 하신 말씀이 거짓이었다고 수정 발표를 하셔야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제자들아, 여래(如來)가 열반(涅槃)에 든다고 하여도 나의 제자가 아니요. 여래가 열반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도 나의 제자가 아니니라.

우리가 얼른 봐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을 마지막 말씀으로 남겨 두셨습니다. 여래, 또는 개개인의 인격체에는 열반에 든 부분과 아닌 부분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열반에 든다고 하면 열반에 안든 인격체까지도 열반에 든다고 하게 되고, 열반에 안 든다고 하면 열반에 든 인격체까지도 열반에 안 들었다고 하게 되어서 물질로 이루어진 것은 무상하다고 하는 법칙에서 어긋난다고 하겠습니다.

육체는 물질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결국은 주관적인 입장에서 그러한 정신세계에 이르면, 내가 지금 죽는구나! 하더라도 이것은 뜬구름이 피어올랐다가 바람 따라 지나가는 걸로 무심히 볼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일러, 생사의 고통을 뛰어넘었다. 고 하는 이른바 초월한 경지입니다. 그래서 혹자는 불교를, 죽음 앞에 떳떳하기 위한 공부.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올바른 생사관은 삶을 즐겁게 누리고 죽음을 편안히 맞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아니, 즐겁게 누려야할 삶도 편안히 맞이해야할 죽음도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즐겁게 누리는 삶! 그것이 바로 편안한 죽음이 될 것이요. 편안히 맞이하는 죽음! 그것이 바로 즐겁게 누리는 삶이 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2009.04.06.
천주사 : 해인사 원응 스님께서 입적하셨습니다. 내일이 영결식이라 오늘 분향을 다녀 오려고 나갔다가 불가피하게 돌아 왔습니다. 여기 또다른 죽음이 있어서 말입니다.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산다는 것은 이것이던 저것이던 끝없이 관계하는 것일 터입니다. 나는 나와의 수많은 관계중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 관계일까요? 매일 매일, 시간 시간 끝없이 살펴보고 관찰해 보지만 딱히 정의를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방황하고 있나 봅니다. 그래서 나의 방황은 끝날 수도 없고 끝내어서도 안 될 것만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이유라고 해도 될 것 같아서 말입니다. [2019-03-07 10:0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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