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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ㆍ假ㆍ中 하나인 일념심 살피는 게 지관 천주산사 2014.08.21
첨부화일 : 없음
空ㆍ假ㆍ中 하나인 일념심 살피는 게 지관


1. 공가중삼관(空假中三觀)
공가중 삼제를 제대로 보기 위한 관법이 공가중 삼관이다. 공으로 보는 공관, 가로 보는 가관, 중으로 보는 중관이 바로 그것이다. 공으로 본다고 함은 모든 사물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요, 가로 본다고 함은 모든 사물의 현상을 인정하는 것이며, 중으로 본다고 함은 모든 사물의 실체와 현상을 하나로 하는 것이다.
일체 사물은 인연화합으로 생긴 허가(虛假)로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공이다. 모든 것이 공임을 알아 일체 사물을 모습과 형체로 보는 일이 없다. 위로는 구해야 할 불과(佛果)도 보지 않고 아래로는 제도해야 할 중생도 보지 않는다.

그러나 보살이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일체 불성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공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심성이 비록 공이라 할지라도 연(緣)에 대할 때는 제법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것이 환화(幻化)와 같더라도 모습과 형체가 한결 같지 않기에, 일체제법이 필경 공이라 해도 그 공 가운데서 행을 닦아 허공 가운데 나무를 심는 것과 같이 중생의 성격과 욕망을 분별해야 한다. 사람의 성격과 욕망이 무량하므로 설법도 무량해야 하고 무량한 변재(辯才)를 성취해야 모든 중생을 이익 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관을 성취해도 아직 방편의 관문일 뿐 정관(正觀)은 아니다. 보살이 일념 가운데 일체 불법을 갖추고자 하면 이변(二邊)의 분별을 끊고 중도정관을 행해야 한다. 심성(心性)이 참된 것도 아니고 거짓된 것도 아니라고 체득하면 진가(眞假)에 인연하는 마음이 쉬게 되고, 심성은 공한 것도 아니고 가인 것도 아니며 그리고 공가(空假)의 법을 깨뜨리는 것도 아니라고 관찰하게 되면, 중도에 통달하고 공가의 두 진리를 원만하게 비추게 된다. 자기 마음 가운데서 중도의 이제를 보면 일체 사물의 중도 이제를 보며 심지어는 중도이제에도 집착하지 않게 된다.

공으로 보기에 미련과 집착을 갖지 않는 것이며, 가로 보기에 최선을 다하며 가엾은 중생을 위해 자비를 드리우는 것이고, 중으로 보기에 온갖 것에 미련과 집착을 갖지 않은 채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이것이 붓다가 경전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관법이다. 제법이 공제이기에 반드시 공관으로 봐야 하고 가제이기에 가관으로 봐야 하며 중제이기에 중관으로 꿰뚫어 봐야 한다. 공을 꿰뚫어 보기에 자유를 얻을 수 있고, 가를 관찰하기에 생의 굴레에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으며, 공과 가를 조화시키는 중도를 실현시키기에 자유가 굴레이고 굴레가 자유임을 터득하여 집착을 갖지 않고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된다.

천태는 교리연구 목적 아냐
깨달음 얻는 것 무엇보다 중요
천태대사 법화경 일문일구를
자기마음에서 찾도록 가르쳐


2. 일심삼관(一心三觀)
공·가·중은 각각 석공관(析空觀)·체공관(體空觀)·차제삼관(次第三觀)으로 표현된다. 물론 이것은 깨우쳐 가는 순서이기도 하다. 우선 제법을 분석하여 제법이 공임을 밝히는 것이 석공관이다. 반대로 제법이 그대로 공이라고 하는 이치에 체달하는 것이 체공관이다. 또 공·가·중의 삼관을 별개로 하여 우선 공의 이해로부터 들어가고 가의 이해로 나아가며 계속해서 중의 이해로 나아가는 것이 격력삼제(隔歷三諦)이고 차제삼관(次第三觀)이다. 석공관에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의 이해가 열려지면 그것은 체공관이 되고, 공관이 색즉시공의 이해에서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이해로 나아가면 그것은 차제삼관으로 된다.

그러나 천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러한 이해와는 달리 공가중을 한 번에 보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을 궁극적으로 내세운다. 공관·가관·중도관이 함께 열려 즉공즉가즉중(卽空卽假卽中)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중도의 이치가 공·가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천태는 이런 일심삼관을 천태지관으로 하여 중도실상을 설하는 법문으로 간주하고 있다. 일심삼관은 공·가·중의 삼제에 의거하여 공관·가관·중도관의 삼관을 일심에서 세운 관법이기에, 일심삼관이 사의의 경계가 아니라는 점에 특히 주목하여 부사의삼관이라고 한다.

부사의한 일심삼관의 이치에 입각하면, 도리상으로는 끊어야 할 삼혹(三惑)도 없기에 ‘부단(不斷)의 단(斷)’이라고 한다. ‘끊지 않는 끊음’이란 말이다. 이것은 삼혹을 끊는다는 것이 아니라 삼혹을 보는 시각을 바꾸는 것을 말한다. 번뇌를 보리로 보는 것이다. 번뇌도 보리도 본래 만물의 성품이고 본래 만물에 갖추어져 있으므로 절대의 입장에서 보면, 번뇌즉보리이며 생사즉열반이기에, 거기에는 끊어야 할 어떤 것도 없게 되는 것이다. 미오(迷悟)의 바탕은 하나이므로 미혹하면 번뇌로 되지만 개오하면 그대로 보리로 될 뿐이다. 그렇기에 일심삼관은 차제삼관과 같이 번뇌를 끊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제법의 본성을 여실하게 알면 번뇌라 할 어떤 것도 없게 된다. 이것을 가리켜 단혹(斷惑)이라고 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제법이 실상이라’고 아는 정도로는 원리가 바로 내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 것으로 되기 위해서는 원리를 체증하여 제법즉실상(諸法卽實相)이라든가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의 이치에 따라 사물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보는 무명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야 한다. 그래서 천태는 그것을 위해 엄숙한 수행을 요구한다. 그것이 바로 지관(止觀)이다. 지관은 열반의 대과(大果)에 이르는 법문이며, 동시에 깨달음을 위한 수행의 길이며, 동시에 모든 덕을 원만하게 성취하는 귀결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상대적인 범주에 입각하여 분별하는 가사의지관(可思義止觀)은 참된 지관(止觀)이 아니다. 상대적인 일체를 초월한 경지가 바로 절대(絶待)이다. 절대는 번뇌·업·과·교관·증득 등을 다 초월한 일체불생을 전제로 한다. 보통 관은 경계인 대상과 마음인 주관이 계합하는 것이지만 절대지관은 경계가 적멸청정(寂滅淸淨)하기 때문에 관도 존재할 수 없다.

지관이 불가득(不可得)이다. 지관이 이미 없다면 불지관(不止觀)도 말할 수 없고, 불지관에 대한 지관도 말할 수 없게 된다. 사의(思議)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으므로 명상(名相)도 없다. 사실 번뇌가 생기는 일도 없고 생사도 없고 파괴할 수도 없어 멸절절멸(滅絶絶滅)인 것이다. 이것이 절대지관이고, 불가사의지관(不可思議止觀)이고 무생지관(無生止觀) 또는 일대사지관(一大事止觀)이다. 능소(能所)·사리(事理)의 대립을 인정하지 않고 지도 아니고 관도 아닌 비지비관(非止非觀)을 그대로 지관으로 한다. 《법화경》 방편품의 ‘세간상상주世間相常住’라는 게송과 같이 세간상이 그대로 적광토의 묘장엄이다. 삶이 그대로 지관이고 불도이다. 일념불생의 마음을 깨달으면 고개를 수그리거나 손을 드는 것도 그대로 불도이고 지관이다. 이 지도 아니고 관도 아닌[非止非觀] 지관을 천태는 《법화경》의 지관으로 삼는 것이다.

진정한 지관은 내 일념심을
제대로 살피는 것
공가중이 하나인 내 마음의
세계만이 있기 때문


3. 심(心)
제법이 공제이기에 반드시 공관으로 봐야 하고, 가제이기에 가관으로 봐야 하며, 중제이기에 중관으로 꿰뚫어 봐야 한다. 그러나 공제 가운데 가제와 중제를 포섭하고, 가제 가운데에서도 공제와 중제를 포섭하며, 중제 가운데에서도 공제와 가제를 포섭하고 있으므로 삼관을 하나로 보는 것이 옳다.

그런데 이렇게 보는 세계는 육안으로 보는 현실세계와는 다르다. 그것은 무어라 생각할 수도 표현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러기에 부사의라 하는데 그 세계가 바로 내 일념심이라고 천태는 단정한다. 따라서 진정한 지관이란 나의 일념심을 제대로 살피는 것이다. 이것이 일심삼관(一心三觀)에 담겨진 본뜻이다. 세상엔 공만의 세계도 가만의 세계도 중만의 세계도 존재하지 않고, 공가중이 하나인 내 마음의 세계만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천태는 단순히 교리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관심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도 그 중심이 된다. 관심수행으로만 붓다의 교상을 자기의 마음에서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태대사는 교상을 밝히는 《법화현의》에서도 오중현의는 모두 관심에 의해 실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고, 칠번공해의 제6에서는 관심단을 세우고 법화에서 설한 모두가 자기의 심중에 관계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법화문구》에서도 관심석을 세우고 법화경의 일문일구를 모두 자기 마음에서 찾도록 철저하게 가르쳤다. 이와 같이 대사가 철저하게 관심을 역설한 것은 불교학의 일대 전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천태삼관은 바로 내 마음의 문제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지창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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