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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심平常心을 도道라 부르지 마라 천주산사 2014.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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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심平常心을 도道라 부르지 마라


중화中華에서 선지식善知識 한 분이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이르니, 이 나라의 큰스님이란 분이 ‘평상심을 도라 부르지 마라!’ 일렀다. 함께 회색 옷 입은 것이 부끄럽고 누가 그 책 볼까 가슴 조마조마하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

하루는 조주가 남전南泉 스승께 도道가 무엇인지를 물었다.

남전 화상和尙께서 이르시길,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조주趙州가 다시 묻는다.
“어떻게 하여야 거기에 도달到達 합니까?”

화상和尙께서 이르시길
“도달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은 달아난다.”

여기에서 위대한 화상[南泉普願]은 '의도'와 '노력'의 차이를 가르쳐 주신다.-

조주趙州가 다시 묻는다.
“하겠다는 생각[意圖]을 버리고 어찌 도道를 알 수 있겠습니까?”

스승[南泉 普願]께서 말씀하시길,
“도道라고 하는 것은 알고 모르는 것과는 상관없다. 안다는 것[知性]은 어리석은 생각에 지나지 않으며, 모른다는 것 또한 단순한 혼란일 뿐이다. 만약 네가 터럭만큼의 의문도 없이 도道를 깨우쳐 안다면, 너의 눈은 드높은 하늘처럼 모든 한계限界와 장애물을 벗어 버리고 일체를 다 볼 수 있게 된다.”

이 말 끝에 조주趙州는 깨닫는다.
여기에서 위대한 스승은 의도意圖라는 실패작失敗作에 대해서 말한다. 의도란 결決코 그대를 지금只今 이 순간에 머물지 못하게 한다. 그것은 그대를 끊임없는 원심력상태에 집어넣어 신과 함께 무無를 정복하러가자는 말과 같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노력努力이란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려고 애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 머무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무엇 때문인지 철저徹底히 파헤쳐 나가면 그 의문疑問의 끝이 바로‘지금 여기’ [法門]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붓다는 ‘지금 여기’ 라는 도道의 문門 앞에 중생衆生을 끌고 오려고 온갖 어중이떠중이에게 조차 그 많은 법문을 하시는 것이고, 서로 간에 복이 많아 상근기上根機끼리 만나면 이렇게 간결하게 해결하는 법이다. 새길만한 이야기를 하나 더 덧붙이자면,

어느 날 조주趙州가 스승에게 묻는다.
“존재의 비밀[有]을 깨달은 사람은 어디로 가야 마땅한가요?”

스승[南泉]은 망설이지 않고 말씀하신다.
“산에서 내려가 아랫마을 한 마리 소가 되어야 한다.”

위로는 스승을 통하여 도道를 구하고 구하여 얻었으면 다음은 아래로 내려가 빚 갚으라고 스승은 엄하게 가르치시는 것이다. 이것이 대승大乘의 행적行蹟이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떠드는 것은 눈 먼 봉사가 횃불을 들고 길을 인도引導하는 것이 되니 옛 어른은 삼가하라 가르치는데, 그 새를 못 참아서 밑으로 기어 나와 포교당이라는 미명아래 세속에 물든 요즘 날의 젊은 승려들은 새기어 볼 일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말 잘하는 사람이 셋 있으니, 하나가 정치인이요, 둘이 약장사고 셋이 사기꾼이라. 그대는 어느 범주에 속하는지 맞대어 보기 바란다. 내친 김에 하나 더 풀어보자.

이 말에 조주趙州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스승에게 철저히 깨닫게 해주셔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러자 스승은 덧붙인다.

“어젯밤 삼경三更에 달이 창문으로 비치었도다.”

이 글은 여러 책에서 인용하나 단 하나도 속뜻[密意]을 알지 못한 체 베끼어 적어 놓았기에 말하려 한다. 지금 스승께서는 조주가 월광삼매月光三昧에 드는 것을 아셨다는 이야기다. 이 삼매에 들게 되면 오밤중에 자다가도 일어나게 되니, 자동으로 가부좌跏趺坐를 틀고 앉게 되며 한쪽 벽면이 누군가가 허물은 듯 무너져 사라져 버리고 그 사이로 보름달이 중천中天에 걸려있는 것이다.

산승山僧이 제일 처음에 맛보았을 때는 달을 가리는 솜털구름[미세한 번뇌]이 바람에 지나쳐 흐르더니, 여러 번 삼매에 들 때마다 조금씩 사라져서 나중에 삼매에서 깨어나 보면 삶에서도 번뇌가 줄어든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달을 선가禪家에서는 심지월[心地月]이라 부른다. 바로 두 번의 혁명이 일어나고 난 후에 여섯 번째 차크라[Ajna Chakra]가 앞뒤로열리어 비밀의 방이 보이게 되면 이곳에서 반공半空에 달을 그려 넣는 것이다. 제자가 월광삼매에 드는 것을 스승은 지켜보며 때를 기다리니, 이 얼마나 멋들어진 인연인가!

평상심平常心이란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의 다른 말이다.

모든 것을 비추어 보이고 어루만지되, 관리자인 에고[Ego]가 사라져 버린 고요함을 밑바탕으로 하는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을 말하는 것이다. 중생衆生들이 평상平常시에 다짐하고 훈련되어진 그 마음[衆生心]을 평상심平常心이라 해석하는 그런 사람을 이 나라에서는 정말 큰스님이라 부른다.

여래장如來藏

무엇이 여래장인가?
이 세상과 이 몸 ․ 마음이 시간의 흐름 속에 쉼 없이 변하여도 결코 변變하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단 한 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주인主人이라 부르나니, 이것이 현상現象으로는 무엇이며 어떠한 색色일까?

선禪의 황금시대에 위대한 선사禪師들이 한 물건이라고도 불렀으나, 물건이라고 일컬어서는 아니 된다. 이것은 안과 밖이 없고 두루 변재遍在 하여 원만[圓滿]이라 표현하나니, 무얼까? 주인이 나는 아니거늘… 거기에 기대는 자를 진실한 선승禪僧이라 부르리라.


조주趙州 고불古佛

조주 스님의 이야기를 앞전에 조금 하였거니와, 사람들의 해석은 너무

어이없는 해석들을 내놓아서 그러지 말라고 당부當付하는 뜻에서 여기 풀어 보인다.

어느 날 남쪽에서 조주를 만나러 온 한 승려가 설봉雪峰스님과 그

제자사이에 있었던 대화 하나를 조주 스님께 들려준다. 그 이야기 인 즉은

제자가 묻는다.
“고담한천[古潭寒泉]은 무엇입니까?”[이건 누구에게 듣고 귀동냥해서 묻는 것이다]

설봉雪峰스승께서 답하신다.
“네가 아무리 뚫어지게 들여다보아도 결코 그 밑바닥을 볼 수 없느니라.”

제자弟子가 다시 묻는다.
“물을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승께서 답하신다.
“입으로 마시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러서 조주趙州 스님께서는 넌지시 농弄을 던지신다.
“입으로 안마시면 코로 들이키나?”

그러자 그 객승客僧이 조주스님께 반문한다.
“그러면 스님께서는 고담한천에 대하여 무어라 말씀 하시겠습니까?”

“물맛이 아주 쓰다.”

“물을 마시는 사람에게는요?”

“죽는다.”

설봉스승께서 이 이야기를 들으시고 찬탄讚歎을 마지않아 '고불古佛'이라 칭稱하셨다.
이를 비롯하여 법호法號를 고불古佛이라 쓰시게 된 것이다.

고담한천[古潭寒泉]이란 수행자가 초선初禪을 증득하여, 붓다로부터 감로甘露 관정灌頂을 받고, 세 번째 혁명에서 여섯 번째 아즈나[Ajna Chakra]가 열리어 반야[Prajna]와 함께 되는 것을 표현한 것으로, 달이 뜨는 그 자리에서 감로甘露가 흘러나와 이 물을 접하고 에고[Ego]가 사라지는 것을 말한다.

추상抽象적인 해석으로 이러쿵저러쿵 안했으면 싶다.

하나 더,

하루는 제자가 이렇게 묻는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스승께서 대답하신다.
“무無”

이것을 화두話頭랍시고 들지 않기를 바라며, 조금이라도 지성知性이라는 것을 지녔다 여기거든 스스로 생각나는 대로 대책 없이 말하는 버릇 삼가길 바라는 바이다. 무無뒤에 두 자字를 더 넣어보자. 바로 ‘의식意識’이라는 단어 말이다.

이 ‘무의식無意識’이란 의식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의식이 잠들어 있어서 주인이 없다는 뜻이니, 그래서 붓다께서 삼악도三惡道를 말씀하시며, ‘지옥 ․ 아귀 ․ 축생’의 세계를 설하시는데 앞에서 여러 번 무의식의 형태를 풀었거니와 조금 부연 설명하자면 뒤에 조주스님께서 전생의 업業 때문에 그리 되었다고 하신다.

지옥地獄 ․ 아귀餓鬼 ․ 축생畜生의 세계 중 축생畜生의 이야기를 조주스님의 개 이야기로 풀어 보이겠다. 무슨 뜻인고 하니, 인간이 남녀가 똑같이 개 같은 행동을 하여도 남자男子는 이리나 늑대, 승냥이, 표범, 호랑이의 몸을 받고 여자女子는개로 태어난다.

차별差別이 아니라 안에 내재되어 있는 복福의 결과물이 다르기 때문이니 여자는 힘이 약하여 다른 이의 보호를 받아야 하고 남자는 여자보다는 더 자유스러워서 그리 된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어째서 개가 되는가?

착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까닭으로 키가 줄어들어 난장이로 나오거나, 짐승의 몸을 받아 닭과 개, 여우 등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無’는 양심良心의 존재存在와 부존不存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본능에 착한 마음이 있는가와 본능뿐이냐는 것이다.

인간人間은 착하기에 사람 몸을 받고 짐승은 안에 양심良心이 없기에 그리된 것이다. 개가 충직하다느니 개는 배신을 안 한다느니 하면서 사람과 견주어 보는 것은 인간의 본성本性을 모독하는 것은 악惡에 해당하기에 삼가 하길 바란다.

개가 충직忠直한 것은 본바탕이 그런 것이지 사고력에 의한 판단으로 그리 하는 것은 아니기에 본능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을 제외하고 지구상 어느 동물에게도 에고[Ego]는 없다. 짐승들은 죽으면 남을 탓하고 의지하는 버릇으로 죽으면 다른 곳보다는 자신을 키운 주인의 가슴으로 들어와 사람의 허벅지(거기가 인간 몸 안에 있는 축생계이다.)속에 자리 잡게 된다.

그래서 붓다는 가축을 키우지 말라 하신 것이다. 고기를 먹는 것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착한 사람이 어느 날 화가 치밀어 올라 갑자기 짐승 같은 행동을 하는 경우도 인연因緣이 없다면 짐승 같은 행동을 하겠는가? 짐승을 먹거나 죽이거나 하는 인연지음으로 내안에 빙의憑依되어 나중에 되갚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붓다께서 짐승 키우지 말고 살생殺生하지 말라 이르는 것이다. 오늘 날 지구상에 수많은 사람이 굶주림에 의해 죽어가고 있는데 도시의 비싼 집에 살면서 강아지에게 ‘엄마’라는 칭호를 써가며 온갖 치장과 비싼 먹을거리를 사다 나르고 있다. 그 돈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지 생각이라도 해 보았는가?

강아지의 엄마라고 불리는 것은 개밖에 더 있겠는가? 강아지의 엄마보고 ‘개 같은 여자’라 부르면 길길이 뛸 것 아니겠는가? 이것이 인격모독이고 도덕성道德性의 말살 抹殺이기에, 그 사람 또한 다음 생에 개로 태어나게 되는 인연을 만드는 것이다.

다시 경문으로 넘어가자.

제자가 다시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이때에 조주 스님께서는 반대로 답하신다.
“유有”

제자가 다시 묻는다.
“불성佛性이 있다면서 어찌하여 개로 태어나게 됩니까?”

“잘난 체했기 때문이지.”

답答은 앞에서 설명하였기에 덧붙일 필요는 없으나, 여기서의 뜻은 누구나 깨어나지 못하고 무의식無意識에 전도顚倒되어 살아가면 ‘아뢰야식’[제8식識, Chaos, 혼돈, 존재, 藏識]의 개입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되고 싶지 않고 벗어나고 싶더라도 결코 도망칠 수 없이 ‘유[有]’라는 존재가 찍어내는 대로 붕어빵으로 호떡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신神에게 아무리 많은 것을 갖다 바쳤더라도 말이다.

여기에서의 유[有]는 그 몸 안의 밑바탕은 불성佛性으로 되어있으나,
잠들어 있어 존재[아뢰야식阿賴耶識]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다는 것이다.

언어言語는 스테레오가 아니다. 이와 같이 스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또 그렇게

질문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사자獅子밑에 사자가 모여 사는 것을 증명證明하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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