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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제다법 살린 초의선사 천주사 2015.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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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사 제다법 살린 초의선사, 훗날 ‘한국의 茶聖’ 칭송

[박동춘 차와사람] 21회 중앙선데이 초의선사와 차

초의 의순(草衣意恂·1786~1866)은 나주 삼향(현재 무안군 삼향면) 사람이다. 교학(敎學)뿐 아니라 선리(禪理)에 밝았던 승려로, 선교융합(禪敎融合)을 중시했다. 특히 초의는 이종선(二種禪)을 주장했다. 이종선이란 선을 인명으론 조사선(祖師禪)과 여래선(如來禪)으로 분류하고 법명으론 격외선(格外禪)과 의리선(義理禪)로 분류하는 걸 말한다. 그가 쓴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는 백파긍선(白坡亘璇·1767~1852)이 설파한 삼종선(三種禪, 선을 의리선·여래선·조사선으로 분류)의 오처(誤處)를 비판하는 한편 자신의 선리를 드러냈다. 초의와 백파의 선리 논쟁에 김정희와 신헌(申櫶·1810~84)이 가세해 초의의 입장을 옹호했다.

배불사상이 팽배했던 시절 유학자들이 선 논쟁에 참여해 견해를 드러낸 것이다. 성리학 일변도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불교계가 선리 문제를 표면화해 논쟁한 사실, 그리고 초의와 백파의 입장을 옹호하는 후인들의 선 논쟁이 근현대까지 이어졌다는 점도 눈에 띤다. 초의는 시문과 불화에도 능했다. 특히 불가에 전승된 초묵법(焦墨法, 진한 먹을 사용하는 화법)을 소치 허련(小癡許鍊·1809~93)에게 전했다.

조선 후기 불교계는 사회적 영향력이 미미했다. 승려는 도성을 출입할 수가 없었다. 천민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경향의 이름 있는 선비들과 교유했던 초의의 저력은 무엇일까. 바로 수행력에서 나왔다. 또 어떤 시기에 누구를 만났는지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초의의 생애는 대략 운흥사 시절과 대흥사 시절로 나눈다. 이때 만난 사람 중 유독 눈에 띄는 인물은 완호(1758~1849)와 다산 정약용(1762~1836)이다. 특히 초의가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1783~1859)을 만난 인연은 추사 김정희(1786~1856)로 이어지고, 추사로부터 경화사족들로 연결되었다. 실로 초의 삶의 변곡점은 대흥사로 거처를 옮긴 일이었다. 여기에서 다산을 만난 인연이 만들어져 그의 인생행로에 절대적인 힘을 발휘했던 셈이다.

한편 범해(梵海·1820~96)의 '동사열전(東師列傳)'에 의하면 ‘어머니 꿈에 여섯 개의 별이 품으로 들어온 후' 초의를 임신했다고 한다. 범상치 않은 태몽이다. 15살 때 남평 운흥사에서 출가해 벽봉화상(碧峰和尙)을 은사로 모셨는데, 출가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1809년 운흥사에서 대흥사로 수행처를 옮겼다. 이 해에 강진 다산 초당으로 다산을 찾아가 학연을 맺는다. 초의가 지은 ‘봉정탁옹선생(奉呈?翁先生)’은 다산을 만난 후 그 감동을 시로 지어 올린 것이다. 이 시에 '내 도리 행해보려 해도(所以行己道)/ 어디에 물어야 할지 끈이 없네(將向問無緣)/ 이리저리 향기 나는 곳 찾아봐도(歷訪芝蘭室)/ 도리어 비린내 나는 생선가게 같았지(竟是鮑魚廛)/ 남쪽으로 모든 성을 돌아다니랴(南遊窮百城)/ 청산의 봄을 아홉 번이나 보냈네(九違靑山春)'라고 하였다. 참 스승을 찾기 위한 그의 갈구는 이처럼 컸다. 이리저리 풍문을 따라 스승을 찾아 9년을 허송했지만 끝내 어진 스승을 만나지 못했던 듯하다.

그러기에 다산을 '덕업은 나라 안에서 으뜸이시고(德業冠邦國)/ 군자다운 모습 어진 본성을 두루 갖췄네(文質兩彬彬)/사사로이 계실 때에도 항상 의를 품으셨고(燕居恒抱義)/ 실천하실 땐 반드시 인을 생각하시네(經行必戴仁)/ 이미 가득하시나 모자란 듯이 하시고(旣滿如不盈) 항상 (마음을) 비워 다른 사람을 포용하시네(常以虛受人)'라고 한 것이다. 하지만 대흥사 사중에서는 초의의 뻔질난 다산초당 출입을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은 듯하다. 그가 이런 상황을 다산에게 알린 것이 ‘상정승지서(上丁承旨書)’다. 이 글에서 ‘근자에 어떤 요망한 스님이 혹 제가 몇 해 동안 송암을 지키고 있는 동안 유림으로 회향할 조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이 제 스승에게 들어가 스승도 따라 의심하게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초의가 말한 스승은 완호로 짐작된다. 결국 초의가 다산을 찾아 갈 수 없었던 것은 ‘이 말 때문에 스승님(다산)의 훌륭하신 덕에 누가 될까 염려 되어 마침내 왕래가 드물어진’ 때문이다.

그러기에 ‘비록 다시 모실 기회가 온다 하더라도 주변의 수군거림 때문에 (제)마음을 다 펴놓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초의가 다산에게 보인 성의가 이랬다. 잠시 비난의 소나기를 피한 초의는 다시 다산의 문하를 드나들며 탁마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1830년 두 번째 상경에서 이름난 경향의 인사들과의 시회에서 그의 시재(詩才)가 빛났던 것은 다산의 훈도와 타고난 문재(文才)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이 밖에도 초의에게 미친 다산의 영향은 그의 역사관이나 학문의 태도를 단단하게 하였다. 다산의 전등계(傳燈契) 제자에 초의가 포함된 것은 이러한 크고 작은 인연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초의는 대흥사에 전해진 제다법(製茶法)을 복원하여 초의차(草衣茶, 초의가 만든 차)로 완성했다. 이것은 민멸 위기에 놓인 차문화를 중흥할 토대를 구축한 것이다. 후일 그를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칭송하는 연유는 여기에 있다. 실제 초의차가 경화사족들에게 알려진 것은 언제였을까. 문헌을 근거해보면 그가 두 번째 상경했던 1830년경이다. 초의는 그의 스승 완호의 비문을 받기 위해 상경했다. 당시 추사와의 친분이 깊어졌기에 추사 댁에 머물기로 약조된 상황이었지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정황은 초의가 쓴 '주상운타(注箱雲朶)'의 후발에 ‘1830년 겨울 취연과 함께 상경하여 홍현주에게 탑명을 구하려 하였다.(중략) 용호로 김정희를 찾아갔으나 김노경이 탄핵 받는 일로 인해 홍현주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홍현주의 별서에 머물며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게 된 셈이었다.

이는 1831년 봄 청량산방의 시회로 초의의 문재가 세상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무렵 그와 교유했던 인사들에게 차를 선물했는데, 초의차를 받은 인물 중엔 이산중이 있었다. 이산중은 초의차를 신위(1769~1845)의 제자 박영보(朴永輔·1808~72)에게 나누어 주었다. 당시 박영보는 서령(西?, 마포 일대) 강의루(江意樓)에 있었고, 신위는 용경(蓉涇)에 머물며 각기병을 치료하고 있었다. 이때 박영보는 이산중에 얻은 차를 신위에게 대접한다. 당시 초의차를 맛 본 박영보는 교유의 증표로 ‘남다병서(南茶幷序)’를 지어 초의에게 보냈다.

신위 또한 이 시에 화답하여 ‘남다시병서(南茶詩幷序)’를 지었다. 이들이 남긴 두 편의 장시(長詩)는 스승과 제자가 함께 초의차를 칭송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문헌적 자료가 풍부한 중국에서도 이런 일례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따라서 이 두 편의 시에는 초의차가 경향에 알려진 정황이나 이들의 차에 대한 이해를 살펴볼 수 있는 진귀한 자료이다. ‘남다병서(南茶幷序)’에서 중요한 부분만을 살펴보자.

옛적에 차를 마시면 신선이 되고(古有飮茶而登仙)
어리석은 사람도 맑고 어짊을 잃지 않네(下者不失爲淸賢)
쌍정과 일주 차는 세상에 나온 지 오래되었고(雙井日注世已遠)
우전과 홍곡의 이름은 지금도 전해지네(雨前紅穀名今傳)
아름다운 다기에 명차를 감상하니(花瓷綠?浪珍賞)
중국차의 진미는 이미 경험했네(眞味中華已經煎)
우리나라에서 나는 차가 더욱 더 좋아(東國茶茶更好)
처음 돋은 차 싹, 여리고 향기롭다하네(名如芽出初芳姸)

차는 응체된 기운을 정화하는 효능이 있다. 그러기에 차를 마시면 상등한 인품을 타고 난 사람은 신선이 되고 하등한 품격의 소유자라도 맑고 어진 마음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박영보 뿐 만 아니라 차를 즐긴 사대부들의 차에 대한 이해였다. 하지만 차의 신실한 이로움을 생활에 응용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경화사족들 사이에서 음다의 즐거움을 아는 이들이 늘어 갔다. 그는 진귀한 중국차를 마셔봤기에 우리나라에서 나는 차가 좋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우리 차에 대한 자긍심은 초의도 '동다송(東茶頌)'에서 ‘우리나라에서 나는 차는 원래 중국과 같아서/ 색, 향, 기미가 같음이라/ 육안차의 (좋은) 맛과 몽산차의 약성을 갖췄으니/ 옛 사람, (우리 차가) 이 두 가지 특징을 모두 갖췄다고 높게 평가 하리’라고 하였다.

한편 신위는 ‘남다시병서’에서 ‘부처님께 공양하고 남은 차는 시인의 벗이요/ 묵객의 품격을 아름답게 높여주네’라고 했다. 자신들의 품격을 높여 주는 정신 음료가 차라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앞서 박영보가 언급한 쌍정차와 일주차는 모두 산차(散茶, 잎차) 종류다. 11세기 홍주지역에서는 쌍정차가 유행했고, 일주차는 양절, 다시 말해 절강성 절서(浙西)와 절동(浙東)에서 만든 명차다. 이들은 이런 명차의 계보를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초의는 어떤 차를 만들었을까. 그가 쓴 '동다송'에 산차 만드는 방법을 언급해 두었다, 당시 좋은 차 잎으로 산차를 만들었다. 이는 다산의 ‘다신계절목’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초의 또한 여린 잎으로 잎차를 만들었을 것이다.

그의 제다과정을 살펴보면 우선 ’솥이 뜨거워지기를 기다렸다가 찻잎을 넣고 급히 덖어낸다. 알맞게 덖어지면 꺼내서 대자리에 놓고 여러 번 가볍게 둥글리듯이 비비고 떨어서 다시 솥에 넣는다. 불을 점점 줄이면서 말린다. 덖고 말림에는 법도가 있다‘고 하였다. 이 과정은 명대에서도 유행하던 제다법이다. 하지만 초의의 제다법은 중국의 제다법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런 전통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항간에서 구증구포(차를 아홉 번 찌고 말리는 방법)가 명차 만드는 방법으로 회자되는 연유는 무엇 일까.

이는 제다법의 엄밀한 방법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만약 다산이 구증구포로 차를 만드는 묘수를 알았다면 그의 가르침을 금과옥조로 여긴 초의가 언급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초의는 차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정밀해야 하는지를 강조해 왔다. 그는 한국 풍토에서 자란 차 잎이 얇다는 한계와 맑음을 담고 있는 차 잎의 특장에 맞는 제다법을 구현해 왔다. 심폐가 시원해지는 통쾌한 품색은 초의가 이룩한 우리 차의 특징이다. 아울러 맑고 시원한 차 맛은 한국 풍토성이 빗어낸 것으로, 초의에 의해 더욱 또렷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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