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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께서 설하신 법어 [불교란 무엇인가?] 천주사 2016.08.16
첨부화일 : 없음
성철스님께서 설하신 법어 [불교란 무엇인가?]


쉬어가고 또 쉬어가니
절름발이 자라요 눈먼 거북이로다.
있느냐 있느냐 문수와 보현이로다
허공이 무너져 떨어지고 대지가
묻혀 버리네
높고 높은 산봉우리에 앉으니
머리엔 재 쓰고 얼굴엔 진흙발랐네.
시끄러운 거리에서 못을 끊고 쇠를 끊으니
날라리 리랄라여
들늙은이 취해 방초 속에서 춤추네
방편으로 때 묻은 옷을 걸어 놓고 부처라 하나
도리어 보배로 단장하면 누가 누구라 할꼬.
여기서 금강정안을 잃어버리면
팔만장경을 고름 닦은 휴지로다.
마명과 용수는 어는 곳을 향하여 입을 열리오.

<한참 묵묵한 후>

갑, 을, 병, 정, 무로다.
억!

홀로 높고 높아 비교할 수 없는 사자왕이
스스로 쇠사슬에 묶여 깊은 함정에 들어가네.
한번 소리치니 천지가 진동하나 도리어
저 여유가 서로 침을 뱉고 웃는구나!
애닯고 애닯고 애달프다.
황금 궁궐과 칠보의 자리 버리고 중생을 위해
아비지옥으로 들어가네.

「나는 여기에서 본분사(本分事)로써 사람들을 대한다.
만약 나로 하여금 근기(根機) 따라 사람을 대하게 하면
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가 있게 되느니라.」고 조주스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근기에는 상근기도 있고 중근기도 있고 하근기도 있으니
근기를 따라서 설법한다면 자연히 삼승십이분교가 벌어지므로
‘나는 본분사로써 사람들을 대할 뿐이요,
근기를 따라서 설법을 하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이 조주스님의 생명선이고
선가(禪家)의 생명선입니다.

불교의 근본을 이론과 언설을 가지고
삼승십이분교 식으로 이렇게도 설명하고 저렇게도 설명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니, 이 법문이 선문의 골수가 아닌 줄 알고 들어야 합니다.
나는 지금부터 선가의 본분을 버리고 이론과 언설로써 불교의 근본 뜻을 말해 보고자 합니다.

불교란 무엇인가?
그렇게 간단하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닙니다.
불교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방대한 경전이 있어서
이 경(經)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저 경을 보면 저렇게 말씀하는 등,
누가 어떤 것이 불교냐고 물으면
이것이 불교라고 한 마디로 대답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예수교나 유교나 회교 같은 다른 종교들은
근본이 되는 경전이 간단하여
예수교는 성경,
유교는 사서삼경(四書三經),
회교는 코란이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통칭 팔만대장경이라 하여 누가 들어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으니 무슨 말씀인지 알기 힘들고,
설사 좀 안다고 하여도 간단하게 어떤 것이 불교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전체를 하나하나 얘기하려면 끝이 없으니 간단히 무엇을 불교라 해야 하겠습니까?

불교란 부처님의 가르침 입니다.
부처(佛)란 인도말로 불다(Buddha)라고 하는데,「깨친 사람」이란 뜻입니다.
불교란 일체 만법의 본원(本源)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의 가르침으로
결국 깨달음에 그 근본 뜻이 있습니다.
만약 불교를 논의함에 있어서 깨친다(覺)는 데에서
한발짝이라도 떠나서 불교를 말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의 근본이 깨치는데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그 깨친다는 내용은 일체 만법의 본원 그 자체를 바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일체 만법을 총괄적으로 표현하여 법성(法性)이라 하고,
각각 개별적으로 말할 때는 자성(自性)이라고 하는데,
그 근본에서는 법성이 즉 자성이고 자성이 즉 법성이니
자성이라 하든 법성이라 하든,
이것의 본원 그 자체를 바로 깨친 사람을 부처라 합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법성이나 자성을 바로 깨치는 길을 가르치는 것이 그 근본입니다.
2500여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새벽에 명성(明星)을 보시고 정각(正覺)을 이루셨으니
이것이 불교의 근본 출발점 입니다.

유교는 공자님이 옛날의 삼경이든 육경이든 이것을 읽고 외우고 하여
문자에 의지해서 거기서 얻은 많은 지식을 가지고 세웠고,
기독교는 예수가 절대신의 계시에 의해서 성경을 말씀하여 세워졌으니
곧 절대신의 계시가 기독교의 출발점이 되고 있습니다.

반면에 불교는 문자에 의지해서 많은 지식을 얻음에 의하거나,
혹은 절대신의 계시를 받음에 의해서 부처가 된 것이 아니라,
보리수 아래에서 자기 스스로가 자기의 힘으로써 선정(禪定)을 닦아 자기의 자성을,
일체 만법의 법성을 바로 깨쳐서 부처님이 되었다는 데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딴 종교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절대신을 전제로 하여 존재하고 있지만,
불교는 신앙의 대상으로서 절대신을 전제로 하지 않고
오직 일체 만법의 법성인 자기의 자성을 바로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니
불교 이외의 다른 어느 종교에서도 이와 같은 이론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불교가 세계적으로 가장 수준 높고 가장 깊은 진리로서
천고만고에 변할 수 없는 독특한 특색입니다.

그러므로 일체 만법의 법성 즉 자기 자성을 바로 깨치는 이것이
불교의 근본 특색으로 되어 있느니 만큼
만약 이 노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된다면
자기 스스로 자기 생명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님들과
역대의 모든 조사(租師)스님들이 자기 자성, 자기 마음을 깨쳐서 부처를 이루었지
절대신이나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부처를 이룬(成佛)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생명선이며, 영원한 철칙이며 만세의 표준입니다.

불교는 성불(成佛),
즉 부처를 이루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나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는 성불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큰 학자라도 언설과 이론만 가지고서 성불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읍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 하려고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놓았는가?

금강산이 천하에 유명하고 좋기는 하나
그것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는 안내문이 필요합니다.
금강산을 잘 소개하면
「아! 이렇게 경치 좋은 금강산이 있었구나.
우리도 한번 금강산 구경을 가야겠구나」 생각하고
드디어 금강산을 실제로 찾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내문이 없으면 금강산이 그렇게 좋은 곳인 줄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이 언어문자로 이루어진 언설과 이론인 팔만대장경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일종의 노정기(路程記)입니다.
팔만대장경에서 불교란 이런 것이다,
부처란 무엇이다. 라고 설명하고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다 그것을 보고 부처님이 귀하고 높으며
불교가 좋은 줄 알아서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언어문자로 된 안내문이 없었다면
부처님의 훌륭하고 좋은 법을 몇 사람이나 알고 있겠습니까?
이러한 언어문자의 기록이 남겨져 있기 때문에
불교를 알게 되고 마침내는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팔만대장경이라는 노정기에 의지하여
실제로 길을 가서 부처가 되어야 합니다.

서울을 가려고 하면서
서울 안내판이나 소개문을 아무리 들여다보고 있어 보았자 서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 걸음을 걷든지 두 걸음을 걷든지 남대문으로 쑥 들어서야지
그러기 전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언어문자인 팔만대장경이 성불하는 노정기인 줄 분명히 알면
그것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언어문자를 무시하고 배격하며
교가(敎家)에서는 언어문자를 숭상한다고 흔히 생각하고 있는데,
만일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교는 꿈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불교도 부처님의 가르침이지 딴 외도(外道) 의 가르침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가에서도 깨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지,
안내문만 읽으면서 평생을 지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교가에 있어서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가운데서도 제일 높은 교가 화엄종(華嚴宗) 입니다.

특히 당(唐)나라 현수(賢首)스님이
그때까지의 화엄종 교리를 집대성하여 종조(宗祖)가 되었으니,
교가에 있어서 현수스님 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을 수 없을 만큼
교가의 대표적인 스님인데,
다음은 그 스님의 말씀입니다.

『이 큰 화엄연기법은 일체 만법이 구족하니 반드시 마음 가운데서 그것을 깨칠 것이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말로써 해석한다면 연기법을 보지 못할 것이요,
반드시 해석을 끊고 실제로 마음을 닦아야 정견(正見)에 이르는 것이다.
만약 마음으로 해석하여 얻으려고 한다면 평생을 헛일만 하는 것이다.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들어갈 것이요,
만약 입으로는 말하나 마음에 깨침이 없는 사람은 곧 미친 사람과 같은 것이다』

교가의 권위자인 현수스님이
이 화엄연기법은 언어로써는 알 수 없고 오직 마음 가운데 이것을 깨쳐야 바로 알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는,
불법(佛法)이란 오직 자성을 깨치는 데 있는 것이지
언어문자를 이해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화엄종의 화엄연기법도 부처님 법이니 만큼
깨친다는 원칙을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만약 누구든지 언어문자만을 따라가고
마음속에 깨치지 못한 사람은
미친 사람이며 평생에 헛일한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니 자연히 화엄경 80권 가운데서는
진정한 연기법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고,
오직 내 마음 속에서 깨쳐야만 그 화엄연기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느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을 데려다
어떤 사람과 꼭 같은 모습을 그려놓고
그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대답을 하겠습니까?
천번 만번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습니다.
아무리 잘 그려 놓아도 그림 속의 사람은 대답을 할 수 없으니
실제의 사람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언어문자는 노정기나 소개문은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실제 금강산이나 서울인 줄 알아서는
영원토록 금강산도 서울도 못보고,
평생 헛일한 미친 사람이 되고 맙니다.

현수스님 뿐만 아니라 교가의 모든 큰스님들도 다 그렇게 말씀합니다.
이제 불교를 바로 알려면 반드시 현수스님 말씀처럼
마음 가운데서 깨쳐야지 여기서 한발짝이라도 벗어나면 불교가 아닙니다.
선이나 교나 자성을 깨치는 것이 불교의 근본이라는 것이 명확하니
공연히 평생을 헛일한 미친 사람이야 될 수 없지 않습니까?

신라의 화엄종조로서 유명한 의상(義湘)스님 은
남아있는 저술이 별로 없으나,
그 대표적인 저술 법성게(法性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으니
모든 법이 움직이지 아니하여 본래 고요하네.
이름 없고 모양 없어 일체가 끊어지니 깨친 지혜로써 알 바요, 다른 경계에서는 알 수 없네.』

불법이란 바로 깨쳐야 하는 것이니
일체 만법의 법성, 자성을 깨쳐야 하는데
그것은 언어문자의 이해로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법성·자성은 일체 언설과 이론을 떠나 있으므로
언어문자로써 표현할 수 없고 말로써 형용할 수 없는데
어떻게 언어문자에 의지해서 알 수 있겠습니까?

이 자성·법성이라는 것은 이름이 없고 모양이 없어 일체가 끊어졌기 때문에
증지(證智), 즉 깨친 지혜로써만 알 수 있고 다른 것으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이 깨친 법성은
참으로 깊고 미묘해서(深深微妙)
일체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言語道斷)
사량 분별이 멸한 것이라,
오직 깨쳐야만 알지 언어문자로서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 주
1) 마명(馬鳴:Asvaghosa). 중인도 마갈타국 사람, 불멸 후 6백년 경에 출세한
대승의 논사(論師). 저서 :〈대승기신론〉 1권, 〈대장엄론경〉 15권, 〈불소행찬〉 5권 등.
2) 용수(龍樹:Nagarjuna). 불멸후 6~7백년경(B.C.2~3세기)의 남인도 혹은 서인도 사람.
인도의 대승불교톨 크게 드날린 이. 저서:<대지도론〉100권, 〈십주비바사〉17권,
〈중론〉 4권, 〈십이문론〉 l권 등.
3) 삼승(三乘). 성문, 연각, 보살에 대한 세가지 교법.
4) 십이분교(十二分敎).
부처님의 일대 교설을 그 경문의 성격과 형식으로 구분하여 l2로 나눈 것.
5) 근기(根機). 교법을 듣고 닦아 중득하는 능력.
6) 조주(趙州:778~897). 중국스님. 임제종. 남전보원의 법제자.
7) 종조(宗祖). 한 종과(宗派)를 세운 조사(祖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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